Blau
tuoi
<그리고 세계는 이어진다>
인생은 너무 짧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인형이 답했다. 브라우는 인형이잖아요. 인형은 영원을 살아요. 죽어도 언제든 수리받으면 영생을 살 수 있어요.
브라우가 답했다. 아가씨, 영원은 없어요. 모든 것에 끝이 있고, 저 또한 거대한 시간의 순간을 부여받은 것뿐이에요. 인형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 모르겠어요. 브라우가 웃었다. 아가씨도 언젠가 알게 되실 거예요.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순간은 너무나도 짧고, 그래서 후에는 지금을 소중히 여기게 될 거예요. 모두가 그랬듯이.
인형은 제 작은 시종이 시간을 다루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시간을 훔치거나 빼앗고, 때로는 돌려주기도 했다. 입을 뻐끔거리는 인형을 향해 브라우가 잔잔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 이 세계에서 부여받은 성녀님의 권능이지요. 인형은 메렌이 운을 다룬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금방 수긍했다. 메렌은 유독 브라우를 꺼렸는데, 그 이유를 묻자 입을 닫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질문에 대신 답한 것 또한 브라우였다. 메렌은 저희 중에 가장 먼저 자유를 얻은 오토마타에요. 그는 때로 당신이나 성녀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티타임을 가질 만큼 자아가 강한 인형이니까, 자유를 얻었으면서도 성녀님께 헌신하는 제가 답답하겠죠. 브라우가 인형에게 손을 건네었다. 인형은 처음으로 그 손을 맞잡는 대신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브라우는 괜찮나요? 저는 당신이 다크룸을 비우거나, 제 곁을 떠나 티타임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아요. 브라우는 처음으로 예의 그 미소를 무너트리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은 영원하지 않아요. 이 세계도, 언젠가 덧없이 사라질 거예요. 그 전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해요. 인형이 물었다. 가령? 브라우가 답했다. 가령, 성녀님을… 긴 침묵이 시간을 채웠고 인형의 눈에 브라우의 얼굴이 비쳤다.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을 브라우는 금방 일그러트리더니 미소로 덮어씌웠다. 죄송해요. 메렌 말이 맞아요. 전 미련해요. 어쩌면 이 모든 게 그분의 탓이라는 걸 이제는 알지만, 그래도 저는 그분이 행복했으면 해요.
전사들이 기억을 되찾을수록 인형이 입을 여는 일도 잦아졌다. 브라우가 네 번째 기억을 되찾던 날 인형은 문 너머로 메렌과 루드, 브라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메렌이 다그치듯이 쏘아붙였다. 그땐 네가 걱정돼서 말하지 못했지만 이젠 알겠지, 브라우? 그분은 처음부터 널… 브라우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만 하세요. 여느 때처럼 잔잔한 미소를 입에 건채 인형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브라우에게 인형은 입을 뻐끔거리는 대신 소리 내어 말했다. 알고 있었죠? 브라우는 고개를 들어 인형을 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 그 전의 기억에서 이미 눈치챘어요. 인형이 다시 한번 물었다. 브라우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브라우는 망설이다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저는 무얼 할지 몰라요. 여전히 원망스러운 마음보다 그분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어쩌면 전 지금도 그분의 명령 아래… 인형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함께 가요. 같은 인형이잖아요. 인형이 손을 내밀었다. 브라우는 대답 대신 입을 뻐끔거리다 손을 마주 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성녀의 고양이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단해, 벌써 영혼이 생겼어! 스테이시아가 손뼉을 쳤다. 인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거겠죠? 스테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아~주 좋은 일이야, 후후후. 인형은 브라우와 스테이시아의 대화를 떠올렸다. 둘은 종종 브라우가 내온 차를 마시며 시간을 이야기하곤 했다. 소녀의 얼굴을 한 인형이 활기차게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간은 흐르지 않아! 시간은 돌지도 않아. 브라우가 물었다. 어째서죠? 소녀가 답했다. 후후, 흐르거나 도는 건 방향이 있잖아. 브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방향이라는 거네요. 스테이시아가 기쁜 듯이 손뼉 치며 웃었다. 노란 눈이 반짝이며 묘한 빛을 발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야… 그래서 새로워. 나조차도 미래를 몰라. 하지만 알 것 같기도 해…. 영혼이 생겼다며 기뻐하는 소녀에게 인형이 물었다. 저번에 브라우에게 하던 말을 들었어요. 스테이시아 생각에 저는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소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인형을 응시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쭈그려 앉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있지, 난 미아를 알아. 내 예상이 맞으면 좋겠어.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다시 후후후, 하고 웃기 시작했다.
인형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주위를 인형과 함께했던 전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브라우가 손을 건네어 인형을 일으켰다. 미아님은 당신에게 의사를 맡기고 갔습니다. 인형이 물었다. 그런 건가요? 브라우가 답했다. 당신이 당신인 채로 이곳에 있어요. 그게 대답이에요. 인형을 둘러싼 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둥이 조각나 부서지더니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인형이 무너지는 기둥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 무엇도 만져지지 않았다. 스러지는 세계 속에서 인형이 나지막이 답했다. 브라우 말이 맞아요. 영원은 없고, 저도 시간의 순간을 받았을 뿐이었어요. 브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는 이것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땅을 지지하던 바위와 흙, 나무뿌리가 아래로 가라앉으며 먼지를 날렸다. 인형은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빛이 보였다. 인형과 함께한 영혼들이 빛이 드는 곳을 부유하고 있었다. 인형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루가 된 세계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빛과 어둠 그 중간 사이에서 브라우가 여느 때처럼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세계는 덧없으므로 아름다워요. 그건 순간이기 때문이에요. 인형이 물었다. 인생도 마찬가지일까요? 슬프지 않을까요? 잠깐의 죽음을 맞았을 때 저는 처음으로 두려웠어요. 브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었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지상은 모래투성이 사막이었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떠나는 전사들을 하나하나 배웅하고 성녀의 인형들만이 남았다. 인형이 물었다. 루드, 브라우. 괜찮나요? 루드가 울상 지었다. 모르겠어. 미아님은… 브라우가 이어 말했다. 미아님의 마음은 평온하셨어요. 눈을 감으실 때 저희에게 처음으로 미소 지어 보이셨어요. 인형은 브라우를 보았다. 여느 때처럼 평온한 미소가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평온한 미소였다. 인형이 어콜라이트 모두와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물었다. 무얼 하고 싶나요? 무얼 할 때 가장 행복했나요? 메렌이 답했다. …전 조용한 마을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요. 그 기억이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거든요. 루드가 이어 답했다. 잘 모르겠지만 식물을 계속 기르고 싶어. 텃밭을 가꾸다 보면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생길 수도 있겠지. 브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차를 끓일 때 가장 편안한 기분이었어요. 인형이 답했다. 좋아요. 그럼 조용한 마을에 정원을 가꾸고 놀러 오는 아이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건 어때요? 메렌이 한숨 쉬었다. 지상에 와서도 함께 할 줄은 몰랐는데. 인형이 웃었다. 이번에는 아가씨가 아니라 동료로 함께 하는 거예요. 잘 부탁해요. 메렌이 앞장서 길을 찾기 시작했고 루드가 그 뒤를 따랐다. 어색해하는 브라우에게 인형이 눈을 마주하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라우, 저는 이번에야말로 삶을 찾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인 채로 있을 방법을 함께 찾아봐요. 브라우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후련한 얼굴로 웃었다. 이제는 시종이 아니라는 거네요. 막 자유와 영혼을 얻은 인형들의 뒤로 모래바람이 불었다. 무질서로 뒤엉킨 세계 속에서 자그마한 발자국들이 길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