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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ul

사람

 

 그 곳에는 휘황찬란한 장식으로서 위엄을 말해주는, 커다란 왕좌가 있었다. 정밀하게 조각되어 있었으며 보석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인이 없었다. 몇 년째인지 속으로 세어보았다. 궁 안,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널찍한 공간 안에는 라울 혼자만이 거닐고 있었다. 가라앉은 공기의 높은 곳에 있는 왕좌와, 금박으로 장식 된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

그 곳은 아름답게 장식된 공간이었으나. 라울에 눈에 비친 왕좌는 공허하게만 비춰졌다. 카펫의 붉은 색은 피로 물들인 것만 같았다.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신체 밖으로 쏟아져 나온 혈액은 부자연스러운 상태이다. 통곡하는 소리, 울먹이는 소리, 살려달라고. 구해줘. 그런 일들. ... 피비린내가 코 끝을 스쳤다. 이는 라울이 익히 기억하고 있는 냄새였다.

처음부터, 모든 조건들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잘못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왕정의 상징과도 같은 이 공간 안에서 반감에 가까운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혁명군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라도, 이 공간이 익숙할 세르바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왕당파와의 전투를 경험했었다면 더욱.

라울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여도 무리가 없는 입지의 인물이 존재할 곳이었기에 라울이 향하는 곳은 보통의 시선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유리창을 통하여 투과한 한 낮의 햇빛이 투명하게 왕좌로 쏟아지고 있다. 그 속에서 라울은 왕좌의 근처를 서성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돌아온 왕국이다. 왕국.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 단어다. 왕정이란 그런 것이었다. 혁명에 몸 담기 전엔 닿을 수 없는 단어였고, 혁명의 기간 동안에는 너무나도 쉽게 사용된 단어기도 했다. 너무도 분에 넘치는 명칭이었다. 그리고 이제와 라울은 그 단어와 다시 한번 마주해야만 했다. 무엇을 느끼는가? 반감이나 분노, 혹은 기쁨을 느껴야만 할까? 그 앞에 라울은 멍하니 서 있었다. 서 있는 시선의 높이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왕좌를 눈에 담았다. 그러나 라울은 그저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왕이 있어야 할 왕좌에는 조용한 공기만이 떠돌 뿐 아무도 없다. 그 앞에는 이미 혁명군에게 숙청당한 왕가의 망령이 있을 것만 같았다. 라울의 코 끝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피 냄새의 주인공은 그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울은 동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에 라울은 이러한 결론을 바라고 있었는지, 또는 떠밀려서 맡은 일인가 하는 의문을 떠올려내었다. 도중 여러 말들이 있었고, 라울은 시대의 흐름에 응답해주었다. 구 왕가의 망령이 떠도는 왕좌를 바라보고 있으니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호국경 파란타인이 생전에는 이룰 수 없었던 일을,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 단순한 우연한 계기로 자신이 맡은 것 뿐이다. 해낼 수 없으리라는 보장은 하지 않는다. 독이 든 성배를 반쯤 마시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왕좌를 한번 손으로 쓰다듬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던 라울은 익숙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여유있는 라울의 발걸음 소리와는 사뭇 달랐던 그 소리의 주인공은 세르바스였다. 

"여기 계셨군요."

"...궁 안에서는 갈 곳이 뻔하니. 그나저나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여기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라울은 세르바스를 향해 속삭였다. 세르바스는 안경을 치켜올린 다음 대답했다. 조금은 급하게 온 것인지 평상시 쓰는 위치보다 안경이 흘러내려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정식으로 대관식을 하기 전이지만 이미 왕위를 이은 분에게는 그에 어울리는 예를 갖추어야 함이 옳으니까요."

그러나 세르바스는 말 뒤에는 '이 곳은 열린 공간이라서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라울은 세르바스의 곁에서 천천히 걸었고, 세르바스는 그런 라울에게 익숙한 듯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관식의 준비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바쁘단 소리군."

심드렁하게 대답한 라울은 다음 순간 세르바스와 눈을 마주했다. 이제는 달라져버린 친우. 그렇지만 여전히 친우이며, 이 나라의 첫 역사가 진행되는 순간부터 다시 한번 얻은 생의 마지막까지도 함께일 것임을 약속한 사이였다. 

 

"남 이야기 하듯이 말하지 말아주세요. 조만간..."

"..."

"폐하의 손으로서 만들어나갈 이 나라의 새 역사를,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다. 세르바스의 입에서 나오는 그 호칭이, 언젠가는 익숙해질 날이 오기를 라울은 속으로 조용히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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