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Riesz

고장

 

Re1 3381년 [귀로]

 

 

 

‘그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세계를 바꿀 것인지 선택해라.’

‘당신은 세계를 바꾸었습니다.’

‘지상으로 돌아갈 건가요?’

 

눈앞에 다시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아닌, 또렷한 색을 지닌 세계가 펼쳐졌다.

소용돌이 안의 세계로 돌아온 것은 아닌지 익숙하고도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과 황야의 풍경이 보였지만, 리즈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인형이 리즈를 버리고 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형이 지상에서 혼자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 ‘그 세계’에서도 그 인형은 마지막까지 이용만 당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디론가 끌려가버린 것은 아닌지 잠시 걱정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또 그 인형의 전사는 리즈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다른 전사를 따라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연이어 들었다.

애초에 리즈는 지상 세계에서도 쭉 그 인형과 함께 있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아닌 다른 전사를 따라간 건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자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했었던 생각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디노와 막시무스는 살아 돌아갔을까?’

디노는 살았지만, 막시무스는 돌아가던 중에 죽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디노도, 이후 어떤 이유로 인해 죽어 리즈가 이때껏 있었던 세계에 왔었다.

‘이데리하의 상처는 완치되었을까?’

이데리하 또한 완치 후 디노와 함께 지내다가 ‘그 세계’에서 리즈와 재회했다. 자신이 죽은 후 몇 년은 더 살았다는데, 그 외모는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자신이 돌아온 이 세계에 디노와 이데리하, 그리고 ‘그 세계’에서 만난 여러 옛 동료들은 여전히 있을까?

지금의 그들은 ‘그 세계’에서 자신과 조우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리즈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연대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세계’에서 본 적이 없는 막시무스는 이제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기에, 리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이대로 연대로 돌아가는 것이 조금 껄끄럽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건강하게 지내고 계실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미 5년, 그리고 리즈의 체감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이었다.

고향의 자경단에는 리즈가 떠나오기 전에도 그만큼 뛰어난 전사가 없었고, 또 그 고향을 지켜야 할 사람도 있어야 했을 것이므로 리즈 이후로 들어온 기수의 대원 중에서도 동향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고향 소식을 따로 전해들은 적도 없었다. 연대의 기지가 있는 남부 인페로다에서 리즈의 고향으로 가려면 바다를 건너고도 한참은 가야 했다. 또, 리즈도 나서서 고향 소식을 들으려 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 생각이 나서, 리즈는 무심코 돌아갈까, 하고 생각해 버렸다.

이대로 영영 연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돌아가도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이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에 소란이 생길 것만 같았다.

어쩐지 지치고 피로해서, 지금 당장은 그런 소란을 겪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돌아간 후 다시 머나먼 고향을 찾아가기엔 필요한 절차가 너무 많았다. 그 때는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리즈는 이내 마음을 굳히고, 걸치고 있던 연대의 겉옷을 벗어 태워 버렸다. 제복을 계속 입은 채로 돌아다니다간 탈영병으로 낙인찍혀 처벌받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고향에 들른 뒤 연대로 돌아가도 인식표는 남아 있으니 그것으로 연대의 대원임을 입증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겉옷을 벗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까운 마을에라도 들러 옷을 갈아입을 계획이었다.

당장 수중에 금품은 없지만 가면서 적당히 이형생물이라도 잡을 생각을 했다. 디노가 입대하기 전, 그렇게 생계를 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디노 특유의 허세가 가득했던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 이야기 자체가 거짓 같진 않았다.

마수의 시체를 사들이는 자가 있다는 것은 기묘했지만, 연대나 ‘그 세계’에서 만났던 몇몇 엔지니어들을 떠올려 보면 어쩐지 납득이 가기도 했다.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닌 중형의 이형생물을 혼자서 처치하는 것은 리즈에게는 이능을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토벌이 아니라 사냥을 목적으로 이형생물을 처치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리즈는 사냥해 가져간 적당한 크기의 이형생물의 사체를 팔고 얻은 돈으로 적당한 검과 셉터를 가릴 천, 그리고 고향에서 즐겨 입던 것과 최대한 비슷한 옷을 마련했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 완전히 같은 복식의 옷은 찾을 수 없었지만 이것만으로도 나름대로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리즈가 돌아온 곳은 디 아이에서 조금 떨어진 황야였다.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세계에서 디 아이는 역시 여전히 건재해 있다는 듯했기에, 조금만 더 디 아이에 가까운 곳에서 눈을 떴거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무작정 걸어 나간 방향이 어긋났다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죽었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으니 꽤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미 결심도 끝났고 고향을 향해 어느 정도 떠나온 후였기에 지금 와서 발걸음을 돌릴 순 없었지만, 리즈는 돌아온 세계의 소식을 들으면 들을수록 한시라도 빨리 연대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디 아이가 몇 년 후 정말로 소멸하게 된다지만, 정말로 그때까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처럼 돌아온 자들이 많다면, 좀 더 적은 희생으로 더 빨리 《소용돌이》를 소멸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후 협정심문관이라는 자들의 손에 가만히 당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리즈는 함께 싸웠던 동료들을 무력하게 죽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고향에 방문하는 것이 먼저였다.

 

연대에 머무르는 동안 단 한번도 아버지에게 연락한 적이 없었다. 자유시간이 생겨도 언제나 개인 단련을 했고, 이능을 발현한 후로는 엔지니어들의 모니터링에 붙잡혀 그런 자유시간마저 별로 갖지 못했었다.

입대하기 전에는 물론이고 연대에의 입대를 위해 떠나온 이후에도 퍽 무신경한 아들이었구나 싶어 돌아갈 때 기념품 같은 것이라도 사 가자고 생각했다.

기념품 따위로 그동안의 무심함을 갚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이 연대에서 친구를 사귀었다는 소식에 가장 기뻐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철없던 어린 시절이 함께 떠올라, 리즈는 얼굴이 붉어져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이봐.”

그때, 옆에서 웬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즈가 지금 있는 곳은 마을의 술집으로, 리즈는 여전히 술을 즐기지 않았으나 이동경로를 정할 겸 잠시 생각을 정리할 곳이 필요해 식사대용의 싸구려 안주와 물만 주문하고 앉아 있던 참이었다.

“뭐지?”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당신한테 나쁠 것 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니까.”

리즈에게 말을 건 자는 스톰라이더로 보이는 사내였다.

황야에 위치한 마을인 만큼, 이곳에는 떠돌아다니다 일거리를 찾는 등의 이유로 잠시 머무르는 스톰라이더들이 많았다.

“호위라면 필요 없어.”

“꽤 자신이 넘치는걸.”

“아직 어느 길로 갈지도 정하지 않았으니까.”

떠돌이 마수 상대로는 정말로 호위 따위 필요하지 않은 리즈였지만,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손을 맞춰본 적도 없는 호위가 있어봤자, 여차할 때 자신이 이능을 사용하는 데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런 솔직한 생각을 입 밖에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길잡이는 있어야지. 지금 같은 때엔 조금만 길을 잘못 들어도 위험할 거야. 특히, 인페로다 국경 내에서 출발하는 배편은 모두 막혔다고 봐도 좋지. 항구를 막은 건 아니지만, 항구까지 가는 길의 도시들을 모두 막았거든.”

“이 부근에 마수가 떼로 몰려다니는 곳이라도 있던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던데.”

“마수 이야기가 아니야. 최근 인페로다가 뒤숭숭한 거 모르나?”

“그게 무슨 말이지?”

장벽이 없어 소용돌이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는 황야라고는 해도 일단은 인페로다에 속한 땅이었다.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이 땅의 사정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성가셔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리즈는 가능한 한 무덤덤한 어조로 물었다.

“혁명군이 계속해서 왕국에 반기를 들고 있으니까. 왕국군은 이제 수상한 놈들은 전부 사형시켜 버리고 있다고.”

“…아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대의 시설도 인페로다에 있고 인페로다 출신 동료들도 많았던 만큼, 왕국군과 혁명군의 대립을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싸움에 자신이 있는 리즈였지만, 그는 소용돌이에서 나온 이형생물과 싸우는 자였지 같은 인간과 싸우는 자가 아니었다.

연대에서 모의 전투 훈련도 쭉 해왔고, ‘그 세계’에서도 여러 종류의 싸움을 해온 덕에 대인전에 약한 건 아니지만 대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인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싸움으로 무작정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그 왕국군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이라도 있다는 소리인가?”

“이제 관심이 생겼나? 좋아,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라고.”

사내는 씩 웃더니 리즈가 남긴 안주를 멋대로 집어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즈는 뒤따라 일어나 남자와 동행했다.

 

 

Re2 3381년 [오탁]

 

 

 

사내가 안내한 곳은 마을 여관의 꽤 커다란 방이었다.

스톰라이더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텐트나 마차를 가지고 있지만, 마을에서 머무를 때는 여관에서 묵는 경우도 많았다.

이 여관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곳이었다.

“이봐, 데려왔어.”

“뭐야, 정말로 데려온 거야?”

“그래. 목적지나 경로에 대해서는 천천히 얘기 나눠 보자고.”

리즈를 데려온 사내는 방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빈 의자는 한두 개 더 있었지만, 리즈는 앉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사실 왕국군을 따돌릴 방법은 있지만 그러려면 마물들의 서식지 한가운데를 지나다시피 해야 해서 말이야. 검을 들 줄이라도 아는 건장한 사내는 하나라도 더 있는 게 좋지.”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에 매여 있는 검에 잠시 머무르는 것을 리즈는 놓치지 않았다.

리즈의 허리에는 이형생물의 사체를 팔아 산 검과 함께 천으로 감싼 셉터가 매여 있었다. 검을 사고 나서는 한 번도 쓰거나 드러내지 않았지만, 몸에서 떼어놓지는 않았었다.

“그러니까 데려가주는 조건으로 마물과 싸워라, 이건가.”

“그렇다기보단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행선지와 총 인원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은 인페로다 밖, 미리가디아 쪽으로. 그리고 마차 두 대 만큼의 인원. 마차도 두 대지만 짐을 많이 싣진 못할 거야.”

“상관 없어. 다른 건?”

“글쎄, 굳이 말하자면 노약자들이 대부분이야. 내가 당신을 데려온 것도 그래서고.”

“과연, 그런가….”

왕국군과 혁명군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인페로다 밖으로 노약자들을 피신시킬 목적인가.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일단은 좋아. 나도 인페로다 밖으로 나가는 게 목적이다. 그 후에도 동행할지 어떨지는 그때 다시 말해보는 게 좋겠군.”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걸. 식량은 우리 쪽에서 준비하지. 익숙하니까. 출발은 이틀 후다. 그때까지 필요한 게 있으면 미리 준비해 둬.”

남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워터필드라고 소개한 후 출발시간에 맞춰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면 된다고 말했다.

리즈는 자신은 역시 스톰라이더처럼 보이지는 않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워터필드가 있던 방을 떠났다.

 

출발일이 되었지만, 리즈의 짐은 여전히 단출했다. 식량이나 물을 비롯한 여행에 필요한 것들은 모두 워터필드 쪽에서 준비한다고 했기에, 혹시 모를 비상상황을 대비한 건식량과 수통이 든 꾸러미, 그리고 셉터를 포함한 검 두 자루와 품속 깊이 숨겨둔 군번줄뿐이었다.

“왔군. 도망쳐버릴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이대로 출발인가?”

“그래, 당신은 뒤쪽 마차에 타면 돼. 이동시간은 꽤 길 테니 통성명이라도 해두는 게 어때?”

그러고 보니 워터필드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지만, 리즈는 자신에 대한 그 어느 것도 밝히지 않았었다.

리즈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 워터필드가 말한 마차에 올랐다.

리즈가 마차에 올라타자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 안에는 리즈와 노인 두어명, 그리고 열 살이 좀 덜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타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인상은 어딘가 눈에 익었다.

“아저씨가 우리랑 같이 간다던 그 사람이야?”

“…그래, 아마 중간까지만일 테지만.”

“흐응… 아빠가 말했던 것처럼 강해보이는 아저씨네.”

“아빠?”

“아저씨를 데려 온 남자 있잖아? 우리 아빠야.”

…어딘가 익숙한 인상이었던 것은 워터필드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머리색 외에는 워터필드 부자는 닮은 점이 그다지 없어 보였다. 나란히 세워놓고 본다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 아들을 맡기는 건가.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 용케도 거기까지 신뢰하는군.”

“무슨 소리야? 나랑 아저씨가 이 마차를 맡은 거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아이를 보며, 리즈는 스톰라이더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어른들을 도와 일을 한다던 디노의 말을 떠올렸다.

게다가 당장 스톰라이더가 아니었던 리즈 본인부터도 십대 초반부터 마물과 싸워 왔었다.

리즈는 금방 납득하고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다.

“그럼 혹시라도 마물이 나타나면 넌 마차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키도록 해. 나는 마차로 다가오는 마물을 최대한 처리할 테니.”

“그건 결국 아저씨가 나를 지키겠다는 거잖아?”

“내가 놓치는 놈이 있으면 네가 처리하라는 거야.”

“그런 거야?”

“그래. 아무리 나라고 해도 놈들의 수가 많으면 나 혼자만으로는 놓칠 수 있으니.”

‘그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몇 번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마차로 다가가는 이형생물은 되도록이면 없게 할 생각이었다.

“그럼 마물이랑 마주치기 전까지 망은 내가 보고 있을게.”

마차의 구조는 뒤가 뻥 뚫려 드러나 있는 형태였다.

아이는 출입구로도 쓰이는 마차의 뒤쪽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마차의 뒤가 뚫려있다고는 해도 난간이 있어 몸을 일부러 바깥으로 내밀지 않고서야 굴러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알겠어. 뭔가 온다 싶으면 바로 말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즈는 곤두세운 신경의 긴장을 풀지 않았다.

뒤로 뚫린 곳을 통해 망을 본다고 해도, 마차 옆을 보려면 마차 밖으로 몸을 쭉 빼야 했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마차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리기라도 하면 아이가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건가.”

“응. 언젠간 나도 아빠 곁을 떠나겠지만. 아빠는 맨날 나한테 잔소리를 해. 내가 아빠 곁을 떠날 때까지 쭉 듣겠지… 그러고 보니 아저씨 아빠는?”

“나는… 만나러 가는 길이야.”

자기도 모르게, 리즈는 개인 사정을 털어놓았다. 연대에서도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오랜만에 찾아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나 헤어지면 다시 볼 일이 없을 상대라 무심코 솔직하게 속마음을 말해버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도 여전히 리즈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던 어린아이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며 새삼 깨달았다.

“아저씨는 아저씨네 아빠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아이도 리즈의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방금 처음 본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리즈는 조금 쑥스러워져서, “좋은 아버지였으니까.”하고 짧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답지 않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멋대로 떠들어 댄 것이 부끄러웠지만, 덕분에 다시 아버지에 대한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덜컹, 하고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무슨 일이지?”

“쉿, 왕국군이야. 그냥 평범한 스톰라이더인 척 해.”

“…….”

안전한 길을 택할 거라던 마차가 왜 왕국군과 맞닥뜨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직후 왕국군으로 보이는 병사가 마차 안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기 때문에 리즈는 따지지 못하고 연대에서 봐왔던 스톰라이더 출신 동료들을 떠올리며 최대한 비슷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어디로 가는 거냐?”

캐묻는 듯한 병사의 말에 리즈가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아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로젠부르그로 가요, 장벽 근처에서 일을 구하려고요.”

“왜 굳이 거기까지 가는 거지?”

“여기선 반란군들이 자꾸 자기들한테 합류하라고 하니까요. 그게 싫어서 그란데레니아로 가는 거죠.”

“그런데 너 같은 꼬마가 거기까지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거냐? 다른 녀석들도 늙어서 힘이 없어 보이는데.”

“우린 스톰라이더니까요. 몇 살이든 할 수 있는 일이야 언제 어디나 있죠.”

아이는 병사의 말에 막힘없이 대답했지만, 의심 어린 눈길은 가시지 않았다.

“정말이냐? 스톰라이더란 것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는 검 끝으로 아이를 쿡쿡 찌르는 것을 보자, 리즈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졌다.

“그쯤 해둬.”

연대에서 알고 지냈던 스톰라이더들을 따라하면서도 그중 가장 친했던 디노는 최대한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건 꽤 힘든 일이었지만 그럭저럭 해낼 수는 있었다.

”우리는 그냥 로젠부르그로 가고 싶을 뿐이야.”

실제로는 미리가디아 방향으로 가고 있었을 테지만, 일단은 의심을 벗기 위해 일부러 아이가 했던 말에 장단을 맞추어 말했다.

”넌 뭐야? 잠깐, 넌 스톰라이더처럼 보이지 않는데…”

리즈가 탄 뒤쪽 마차에서 소란이 길어지자, 앞쪽 마차 근처에 있던 병사들도 우르르 몰려왔다.

어쩌면 디노를 따라하는 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후회하며, 리즈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난 그냥 가는 길이 같아서 이 마차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괜한 마찰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역시 의심스러운데. 어이, 잠깐 나와 봐라.”

“잠깐만요, 이 아저씨는….”

“아냐, 별 일은 없을 거다. 그냥 안에 있어.”

리즈는 그렇게 말한 뒤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마차를 둘러싼 병사들은 열댓 명쯤 되었고, 대부분 총을 들고 있었다.

머릿수로만 따져도 아마 리즈 일행의 모두를 합친 것보다 많을 것이고, 게다가 총으로 무장까지 한 상대였다.

그러나 리즈는 전혀 겁먹지 않고 병사들 사이에 섰다.

“켕기는 건 없어. 주머니를 뒤져봐도 좋아.”

“아니, 일단 도시로 가야겠다. 따라오도록.”

“그건 곤란한데. 일정을 지체할 수는 없어.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조금 전 아이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며 마음을 풀어놓기는 했지만, 여전히 연대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런 일로 복귀가 늦어지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감히 우리 왕국군의 명령을 거부하는 거냐?”

“터무니없는 걸 요구한 게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리즈는 그렇게 말하며, 천에 감싸인 채 허리에 매여 있는 셉터가 아닌 싸구려 검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곤란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방심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상대는 이형생물도 아니고 그저 인간이었다. 자신이 연대에 속한 ‘성기사’라는 사실을 알리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리즈는 값싼 철검을 뽑아 들었다.

이런 검 따위는 리즈의 화염을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겠지만, 어차피 ‘성기사의 힘’을 쓸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리즈가 얕본 것은 사실 눈앞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소, 소용돌이의 괴물이다! 도망쳐!”

저 멀리서, 늑대의 모습을 한 이형생물들이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리즈로서는 지긋지긋하도록 봐왔던 마물일 뿐이었지만, 병사들에게는 아니었다. 물론 노인과 아이로 이루어진 마차의 스톰라이더 일행도.

“…아저씨!”

마치 미리 짜두기로 한 것마냥,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리즈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마차는 멈추지 않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곧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리즈와 이형생물을 앞에 두자 순식간에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병사들,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식인 늑대들이었다.

 

Re3 3381년 [소문]

 

 

 

식인 늑대 무리에게서 철검 한 자루만 잃고 비교적 멀쩡한 몸으로 살아나온 리즈는 마차가 사라져 간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연대에 있을 시절엔 동료와 함께 이형생물들을 격퇴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그 세계’에서는 혼자서 인형을 지키며 나아가야만 했다.

그곳에도 동료는 있었지만,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우는 경우는 드물었다.

덕분에 늑대들이 한꺼번에 덤벼드는 난전 중에서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혼자서, 그것도 함께 싸워본 적도 없는 사람을 보호하며 싸울 수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리즈에게 위협을 가하던 병사들은 순식간에 쓰러져 버렸고, 리즈가 들고 있던 철검은 곧 겁화의 화염에 둘러싸였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다수의 이형생물을 상대하는데 ‘성기사의 힘’도 쓰지 않고 검 한 자루만으로 싸울 수는 없었다. 우선은 여기서 살아남아야 했다.

 

검이 리즈의 화염을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리기 시작할 즈음, 결국 마지막 늑대가 쓰러졌다.

그러나 여기까지 타고 왔던 마차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낭패였지만, 생각해보면 거기서 뛰어내려버린 것은 리즈 자신이었으므로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서있기만 할 수도 없었던 터라, 리즈는 일단 검을 버리고 마차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봤자 마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막막한 기분을 품고 한 시간쯤 걸었을 무렵, 저 멀리 멈춰 서 있는 마차가 보였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리즈가 탔던 그 마차인 것 같았다.

리즈를 기다린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겼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리즈로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리즈는 걸음을 서둘러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마차는 추측대로 리즈가 탔던 바로 그 마차였고, 무사히 살아 돌아온 리즈를 본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중에는 리즈와 대화를 나누던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이는 리즈를 향해 달려왔다.

“아저씨!”

“…아.”

자신에게 매달리듯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던 리즈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마차에서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사실 리즈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이 서툴렀다.

‘그 세계’에는 불행히도 어린아이 또한 있긴 했지만, 리즈와는 그다지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었다. 그를 이끌던 인형 또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으나, 외형도 성격도 진짜 어린아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리즈는 일단 생각나는 말을 건넸다.

“…무사했구나.”

“응… …진짜 살아 돌아올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뭐, 운이 좋았지.”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리즈는 그렇게 어물쩍 넘겨버리고 말았다.

리즈의 몸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화염을 일으키기 전 튀었던 마수의 체액이나 주변 병사들의 피가 여기저기 묻어있었기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더 멀쩡하지 않은 상태로 보였고,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운이 좋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리즈의 말에 대강의 납득을 한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마차를 멈추고 잠시 기다리자고 한 것은 아이였고, 리즈가 다시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리즈가 합류했기에 다시 출발한 마차 안에서 스톰라이더들이 쓰는 연고를 자잘한 상처에 문지르고 있는데, 아이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어딘가 눈치를 보는 표정 같기도 했다.

“…왜?”

“으응… 그냥. …점심은 마차 안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마물이 잘 안 오는 공터에서 야영하면서 먹는대.”

“그렇군.”

어차피 일정에 관한 것은 전부 워터필드라는 남자에게 맡겼기 때문에, 리즈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만 말았다.

아이는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리즈는 무슨 문제가 있나 고민하다가, 말이 너무 짧았나 싶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나를 기다리자고 해준 건 너였다지. 고맙다고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되겠군.”

“계획을 미리 말해주지 못한 건 나니까, 그 정도 책임은 져야할 것 같아서.”

“너희 아버지도 나한테 아무 말 안 해 줬는걸. 그리고…….”

아버지 하니 아까 그 일이 있기 전 멋대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주절거리느라 말할 타이밍을 주지 않은 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리즈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문제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엔 다른 ‘동료’들이 휘말려 다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리즈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곤 금세 평소대로 되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말인데, 나는 소문에 밝지 못해서. 너희들은 소문에 밝은 것 같으니 최근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혹시 ‘그 세계’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함께 지상에 되돌아왔다면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최근 들어 소용돌이가 늘어나긴 했지만, 예로부터 이런 일이 몇 번씩은 있었기에 이번도 그런 시기인 것 같다는 이야기라던가, 그게 그 직전에 연대라는 곳에서 커다란 소용돌이를 제거하는 데에 실패했는데 그 영향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던가 하는 말들이 조금 걸리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 세계’에 다녀오기 이전에도 고향인 카난의 마을, 그리고 연대 안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세상사에 그리 밝지 못했지만, 아이가 말해주는 이야기 속 세상은 그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어딘가 이상했지만, 리즈는 오랜 시간동안 군인, 그것도 일개 대원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의문을 품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말 뿐이었다.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연대로 돌아가 옛 동료들을 만나면 이 위화감도 다소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대강 알았다. 고마워.”

“혹시나 새로 알게 되는 게 있으면 알려줄게. 가는 길에도 스톰라이더끼리는 몇 번씩 마주치곤 하니까, 그럴 때도 서로 소식이나 정보를 공유하거든.”

“믿음직스러운데. 아, 그러고 보니 내 검도 잃어버렸어. 가능하다면 하나 구할 수 있었으면 하는데. 품질은 어떻든 상관없지만, 너무 크거나 무겁지는 않은 걸로.”

“응, 그것도 아빠한테 물어볼게. 아저씨는 싸우러 온 거니까, 무기가 없으면 우리도 곤란할 거야.”

셉터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작전 중도 아닌데 연대 밖에서 ‘성기사의 힘’마저 써버린 상황에 여기서 더 이상 연대의 일원으로서의 흔적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이야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성기사의 힘’ 또한 최대한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리즈는 다시 전투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다른 검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리즈 일행이 바로 이틀 후 상인단을 안내하는 스톰라이더와 만났기 때문에, 상인으로부터 적당한 검을 하나 살 수 있었다.

처음에 샀던 검보다는 비쌌지만 그만큼 좀더 쓸 만했고, 무엇보다 워터필드가 값을 지불해버렸기 때문에 지출 없이 새 검을 얻게 된 리즈로서는 불만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검과 함께, 리즈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다른 소식도 함께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황야에 불꽃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형생물이 나타났다는 건가.”

“그래. 소용돌이에서 나온 마물들 중 그렇게 강한 불꽃을 내뿜는 건 그놈들밖에 없거든. 당신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검집에 든 검을 건네며 그렇게 말한 워터필드는 이틀 전 그들이 지나쳐왔던 경로에서 발견되었다는 불에 탄 사체들을 포함한 불꽃의 흔적에 대해 말했다.

매우 호전적이어서 다른 이형생물들도 태워버리곤 한다는 그 마물은 리즈로서도 익히 아는 것이었지만, 그 흔적이 이형생물의 것이 아니란 것을 리즈는 알 수 있었다.

“…주의하도록 하지.”

무거운 마음으로 대답하며 리즈는 검을 받아들었다.

아마 그 마물의 소식을 들었기에 일부러 값이 나가는 것으로 사서 주었을 이 검이 전에 쓰던 것보다 예리하고 균형도 잘 잡혀있는 물건이라, ‘성기사의 힘’이나 셉터를 여행 중에 다시 사용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는 게 그나마의 위안거리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어디쯤이지?”

“국경 근처에 거의 다 왔어. 오 일 안에 미리가디아령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 후에도 동선만 겹친다면 계속 동행하고 싶은데…”

“…생각해보도록 하지.”

조급함을 내리누르며, 리즈는 그렇게 말하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생각해보겠다고는 했지만, 리즈는 인페로다 왕국군과 부딪힐 일만 없어진다면 최대한 빨리 혼자가 되고 싶었다. 검은 고마웠지만 지금 이대로는 신경 써야 할 남의 눈이 너무나 많았다.

혼자 움직인다면야 어쩌다 ‘성기사의 힘’을 쓴다고 해도 흔적만 남아 마물의 짓이라고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쓸 수는 없었다. 민간인에게 힘을 사용한다는 직접적인 위반사항은 저지르지 않겠지만, 연대에 속한 사람이 멋대로 힘을 쓰며 돌아다닌다는 것을 여기저기 알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탈영병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고, 그에 대한 각오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와의 재회를 포기할 마음도 없었다. 그의 마지막 미련들 중 하나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카난으로 가야만 했다.

‘그 세계’에서 아버지는커녕 닮은 사람도 한 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간절한 바람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

그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쪽을 향해 돌아보자 빠르게 사라지는 작은 체구가 보였다. 그 움직임은 빠르긴 했지만 이형생물이라고 판단할 만한 것은 아니어서, 리즈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안녕.”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리즈가 다시 시선을 돌리자, 어쩐지 익숙한 인상의 여성이 말을 걸어 왔다. 원래의 일행은 아니고, 오늘 밤만 함께 야영하기로 한 상인단과 함께하는 스톰라이더들 중 하나인 듯 했다.

“나는 브렌다야. 원래는 이렇게 우연히 만난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 편이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뭐지?”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리즈로서도 퍽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기도 했고 이렇게 금방 검을 다시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상인단 덕이라 그 상인단 일행에 속한 브렌다라는 여자를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별건 아니고, 혹시 우리 오빠를 알아? 이름은 디노라고 하는데. 몇 년 전에 당신처럼 연대로 갔었거든.”

“…….”

“그렇게 쳐다보지 마. 당신, 딱 봐도 그쪽 사람의 냄새가 나는걸. 이 근방을 잘 아는 스톰라이더라면 한눈에 다 알 거야. 당신 일행도 그래서 당신이랑 함께 다니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나도 다른 속셈은 없어. 그냥 오빠의 소식을 듣고 싶을 뿐이거든. 그 사람, 훌쩍 떠나버리더니 그 후론 소식도 없고 돈만 보내오고.”

“…디노라면…”

리즈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분명 디 아이에서는 제대로 돌아간 것 같았으나 결국은 그를 ‘그 세계’에서 만나고 말았다. 무사히 돌아갔었다는 것도 ‘그 세계’에서 만난 본인으로부터 들은 것이고,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듣지 못했다. 그도 분명 그곳에서 돌아왔을 테지만,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 걱정 마. 최근 위험한 임무에서도 살아 돌아왔다는 것 같던데.”

“아, 역시 아는구나! 동료였나 보네.”

“아직도 동료야. 지금은 개인적인 볼일 때문에 잠시 나온 거라서.”

“뭐야, 거기 생각보다 풀어진 곳인가 봐? 아치볼드도 종종 나와서 파란타인이랑 쉐이라한테 찾아간다더니. 그런데 왜 오빠는 찾아오긴 커녕 안부편지도 하나 안 보내고….”

“…….”

고향인 카난이 연대의 시설이 위치한 인페로다와 너무 멀어 시간이 나도 알아서 시설 안에서만 있었던 리즈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신, 만나게 되면 말을 전해주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고마워. 당신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심정도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다들 흩어져 방랑하며 사는 게 우리 스톰라이더긴 하지만, 그 연대란 곳은 매번 위험한 임무를 하러 간다잖아.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텐데.”

브렌다의 푸념에 한 마디 변명할 말도 없는 리즈가 입을 다물었다.

“오빠 소식도 전해줬으니 그 보답으로 내가 뭔가 해줄 게 있을까? 오빠가 보내오는 돈을 보면 당신도 금전적으로는 그다지 부족하지 않을 것 같지만….”

리즈는 브렌다의 예상과는 달리 지금 당장은 돈은 없긴 했지만, 딱히 필요한 물건도 없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여기서 연대의 대원을 봤다는 말은 퍼뜨리지 말아줘. 정보가 퍼지는 속도가 굉장히 빠른 것 같던데, 내가 밖에 있다는 사실이 되도록이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해서.”

“음… 뭐, 알았어. 그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지. 달리 부탁할 건?”

“…카난 쪽의 소식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알려줄 수 있나?”

“카난? 으음… 그쪽의 소식은 없는데.”

“그런가. 그럼 됐어.”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네. 요새 이상하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지역이 많아서 말이야.”

브렌다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노의 동생이라더니, 얼굴 말고는 닮은 점을 찾기 힘든 사람이었다.

“오빠 소식을 전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그럼 안녕.”

브렌다가 자신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버린 후, 리즈는 마차로 되돌아왔다.

저녁이 다 되었기 때문인지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틀 전의 그 일 이후로 운 좋게도 전투 한 번 치르지 않았는데 마치 연대에 있던 시절 모니터링을 받았을 때처럼 녹초가 되어 버려서, 리즈는 그대로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며 아이가 알리러 올 때까지 마차 안에서 팔짱을 끼고 앉은 채 자고 말았다.

 

Re4 3382년 [새]

 

 

 

리즈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육포와 검은 빵을 끓여 만든 스튜 건더기를 질겅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끓였는데도 여전히 질겼지만, 황야를 건너는 중에 이 정도면 꽤나 괜찮은 식사였다.

사실은 식사의 질에 관한 문제를 떠나서, 아직도 매 끼니때마다 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동안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세계에 있었지만, 결국 적응이란 걸 할 만큼은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괜찮아?”

“뭐, 여행 중에 이 정도면 훌륭하지. 스톰라이더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알아.”

“으응…”

식사의 이야기를 묻는 게 아니었던 듯 아이가 어물댔지만, 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리즈는 다시 식사를 하는 데에 집중했다. 질긴 빵과 육포는 온 신경을 기울여 열심히 씹지 않으면 마차가 정지해 있는 시간동안 다 먹을 수 없었다.

 

“…….”

꿈에서 헤어졌던 아이와의 기억을 꾼 리즈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꿈은 잘 꾸지 않는 편이었지만, 지상에 돌아온 후로는 되찾은 것이든 새로 쌓은 것이든 이렇게 불쑥 꿈으로 되새기는 일이 잦아졌다.

리즈는 조금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기계말에 올라탔다.

 

루비오나로 간다는 스톰라이더들과 자신의 소속이나 목적지를 함구해줄 것을 조건으로 아발론 남쪽까지 동행했던 리즈는 이제 혼자서 폰데라트를 건너 카난으로 가고 있었다.

동행하는 동안 몇 번이나 리즈 덕분에 이형생물들에게서 목숨을 구한 워터필드 일행의 배려로 그럭저럭 괜찮은 기계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어린 시절을 전부 마을과 그 근처에서만 보내고 입대 후에도 콜벳이나 아스널 캐리어라면 몰라도 기계말 같은 일 인승 탈것과는 영 인연이 없던 리즈는 새로 얻은 탈것에 적응하느라 꽤 애를 먹고 있었다.

그 때문에, 혼자 움직이게 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이제야 겨우 폰데라트에서 론즈브라우 사이의 국경 근처에 와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들과 동행할 때 기계말을 타는 방법을 좀 배워둘 걸 그랬다고, 리즈는 조금 후회했다.

 

결국 기계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잠시 포기하고 천천히 걷게 하며 가던 중, 리즈는 무장한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이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에서 마주치면 귀찮은 일이 될 것 같아 말머리를 조금 돌리는데, 저쪽에서도 리즈를 발견한 것인지 속도를 높여 리즈에게로 다가왔다.

추격을 따돌릴 만큼 기마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또 괜히 어설프게 피하려다 의심만 살 것 같아 리즈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이봐, 당신, 인페로다 쪽에서 왔나?”

“…그런데?”

그리고 코앞까지 기계말을 몰아 다가온 낯선 남자가 건넨 말에 리즈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언제든 검을 뽑아들 수 있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럼 혹시, 당신은 불타는 새를 거느리고 다닌다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

“뭐?”

생각지도 못했던 상대의 말에 당황한 리즈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나 리즈를 당황스럽게 만든 질문을 내뱉은 남자는 장난스러운 기색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모르나? 인페로다 쪽에서 왔으면 미리거디아를 거쳐 왔을테니 분명 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이미 거기서 떠 버렸나?”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카난까지 가는 길에는 다른 사람들과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도 신경 쓰이는 이야기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리즈는 검을 쥔 손에서 힘을 조금 빼고 표정을 굳힌 채 남자의 말 앞을 가로막으며 캐물었다.

“아, 그게 말이야. 루비오나에서 머물고 있는 스톰라이더들 중 하나가 인페로다에서 황야를 건너오면서 불타는 새를 부리는 녀석을 봤다고 떠들어대는 거 아니야. 처음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 소문이 퍼지니까 미리가디아에 있던 다른 무리도 봤다고 나서고. 그게 진짜라면 이형생물을 길들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다들 흥분해서 이렇게 황야를 뒤지고 있지. 혹시라도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남자의 말을 들으며 리즈는 대략적인 상황파악을 했다.

스톰라이더들은 리즈의 행적과 정체를 밝히지 않겠다고 했지만, 더해서 사실과 어긋난 정보를 뿌리기까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야에 사람이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이건 잘만 이용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우선, 황야를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어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게 될 것이었다.

엔지니어나 연대의 사람들이 들었을 때 곧바로 자신이란 것을 알아챌 확률도 있었지만, 일단 자신은 ‘디 아이’에서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을 사람이기에 그 세계에 있다가 돌아온 전사들이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사들이 있다면, 만나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정보나 인형의 행적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리즈는 워터필드 일행에게 자신이 ‘성기사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다들, 혹은 그중 누군가는 대략적인 눈치 정도는 챈 듯했다.

그랬기에 저런 소문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리즈는 조금 복잡한 심정이 되어 그렇군, 하고 대답했다.

“뭔가 짚이는 건 없어? 다들 그 사람에 대한 단서라도 찾으려고 난리야.”

“글쎄….”

“처음 며칠간은 다들 쉬쉬했지만, 이런 수상쩍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타나곤 했던 녀석들이 이번엔 잠잠해서 말이야.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오게 된 거지. 아니, 이번에라고 해야 할까, 얼마 전부터 그 녀석들을 먼발치에서라도 봤다는 녀석들이 거의 없군. 멀긴 하지만 분명히 공중에 떠 있던 도시를 봤다는 녀석은 언제부턴가는 아예 없고….”

“…그런가.”

리즈가 생각하기에 남자의 말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있었다.

남자가 말하는 ‘녀석들’은 엔지니어인 것이 분명했는데,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시간 속에서는 엔지니어들의 도시인 ‘판데모니움’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물론 그는 일개 대원이었으나, 적어도 판데모니움이 관계된 연대의 소속이었으므로 보통 사람들보다는 엔지니어에 대해 조금이나마 자주 마주쳤었다.

언제나 지상 출신인 대원들과 최대한 거리를 두며 딱딱하고, 억누르는 듯한 말투를 구사하던 자들.

동료라고 부르기엔 거리감도 멀었고 불편한 사람들뿐이었지만, 어쨌든 연대에 있어 없으면 안 될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 엔지니어들의 도시인 판데모니움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카난 쪽에서의 소식도 들리지 않게 되었었다고, 브렌다도 말했었다.

잘은 알 수 없었지만, 모두 연결된 일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돌아온 세계에는 리즈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원래부터 그랬다.

리즈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어린 시절부터 세상은 리즈가 잘 알지 못하는 일들 투성이였다.

한때, 오랜 시간 동안 그 모든 것들에 분노를 품고 살았었지만 언젠가부터는 그러지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리즈의 마음속을 미미하게 적시는 감정은 분명 분노였다.

리즈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곤 하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자각하도록 해라.’

그 말은 리즈를 이때까지보다 더욱 강하게 고향으로 이끌었다.

리즈는 남자와 그의 일행과 헤어져 다시 길을 떠나기 전에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군.”

“오, 그래? 뭐든 좋으니 말해 줘. 단서가 될 지도 모르니까.”

“글쎄… 내가 듣기로는, 죽지 않는 새를 거느린 전사가 돌아다닌다던데.”

“죽지 않는 새? 혹시 불타는 새랑 같은 새인가? 아무튼 고마워. 당신은 어디로 가나?”

“나는… 카난으로 간다. 혹시 당신은 그쪽 소식을 들은 것이 있나?”

“아니, 미안하지만 나는 바로 여기서 조금 북쪽에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듣고 인페로다로 향하는 참이야. 그러고 보니 남쪽 소식은 영 들은 것이 없군.”

“그런가. 알았어. 인페로다로 갈 거라면 왕국군을 조심해.”

“아아, 고마워. 당신도 카난에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지.”

 

남자와 헤어진 리즈는 남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고생이 보람 있어 기계말에도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덕분에 말을 달리는 속도가 조금 늘었다. 이대로라면 폰데라트를 건너는 데에 들었던 시간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론즈브라우 왕국령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콜벳으로 이동했다면 기계말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도착했을 테지만 지금은 육로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 육로의 더딘 속도로밖에 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이 여정도 곧 끝이다.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즈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Re5 3382년 [전장]

 

 

 

마지막 마을에서 사온 식량이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남쪽에서의 발길이 뚝 끊긴데다 남으로 간 사람들 중 돌아온 사람도 하나 없다는 마을 사람의 말을 듣고서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식량을 사서 떠난 지 한참이 지났다.

쭉 내려와 서남으로 방향을 튼 지도 꽤 오래 되었는데 그동안 사람도, 이형생물도 전혀 보지 못했다.

심지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시체조차도 없이, 오로지 끝없이 펼쳐진 황야뿐이었다.

본디 마물이라 불리는 이형생물들이 들끓던 땅이었다.

입대 후 몇 번인가 연대에서 이 지역의 소용돌이를 몇 개 소멸시켰다고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대를 떠돌던 이형생물들이 한 번에 소멸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새롭게 생성되는 소용돌이들도 있다.

그러니, 결국 ‘디 아이’를 소멸시키지 못한 지금 이곳이 이렇게나 고요한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도 마물도 없는, 죽음과도 같은 땅.

그것이 리즈가 이 땅을 달리는 내내 애써 떨쳐내려 노력하고 있는 감상이었다.

 

식량은 이제 돌아갈 때 먹을 것도 남지 않았다.

리즈의 고향이 무사하다면 그곳에서 새로 사서 처음 연대로 갈 때처럼 소즈버그를 통해 해로로 인페로다를 향해 가면 그만이겠지만, 지금 리즈의 시야에는 도시는커녕 허물어진 성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면 갈수록 이 황야에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이 땅으로 왔다가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 있을까.

또, 이 땅에 원래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버지는 어디로 가신 걸까.

이 땅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들었던 의문들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분노와 함께 불쑥 솟아올랐다.

자신은 분명 이 땅에 돌아오기 위해 끝없이 싸우며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는 여행을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온 세계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다시 찾은 기억들은 잃어버리기 전보다 선명했다.

그렇기에, 리즈의 분노 또한 선명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한동안 달린 후 잠시 휴식을 위해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 앉았다.

이 땅에는 바람조차도 불지 않고 있었다.

마치 무한히 펼쳐진 땅 말고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같았다.

리즈는 문득, 지금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 공간에 가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세계를 바꿀 것인지 선택해라.’

그 말을 들었던 공간. 가장 마지막에 되찾았던 기억.

자신은 분명 세계를 바꾸었고, 죽음을 헤치고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바꾼 세계가, 과연 자신이 원하던 세계인가?’

그런 의문이 들자마자, 시야가 어그러지는 것처럼 바뀌었다.

“이것이 당신이 바꾼, 당신이 만든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그와 동시에, 선명한 소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그러진 시야 속에 구겨진 기계말과 잔뜩 꼬인 지평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당신의 영혼이 가진 힘으로 만든 당신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당신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 정도 규모로밖에 만들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기억중 나와 공유한 부분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었던 곳, «레지멘트»를 중심으로 일정 반경만큼만.”

“너는….”

“제가 이어받은 능력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당신과 이렇게 접촉한 것도, ‘그녀’가 다른 세계에 개입하느라 이 세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소녀의 목소리는 익숙했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목소리, ‘그 세계’에서 만났던 바로 그 인형의 것이라는 것을, 리즈는 금방 눈치 챘다.

“…그럼, 아버지는… …사라진 건가?”

“아니오,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이 부근에 원래 있었어야 했던 것들과 함께 구현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이질적이지만 비인간적이지는 않은 목소리로 들려왔다.

내용 자체는 리즈에게는 별 차이 없는 사실을 정정하는 것뿐이었지만, 인간이 아닌 인형의 목소리에서는 분명한 미안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다만, 그게 리즈에게 위안을 주지는 못했다.

리즈가 되찾은 세계는 반쪽짜리밖에 되지 못했다.

그러나 리즈가 느낀 것은 좌절보다는 분노였다.

‘그렇다고, 조용히 납득하고 돌아갈 내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리즈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리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인형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도 방법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던 중 제안 받았습니다. 당신과 같이 부활한 전사들의 세계를 온전히 되찾을 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리즈는 여전히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인형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일그러진 허공을 응시했다.

빈 공간을 노려보는 눈초리는 날카로웠다.

 

인형은 리즈가 가진 반쪽짜리 세계의 나머지 반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다시 싸워야만 한다고 말했다.

리즈처럼 각자의 가능성을 쥐고 부활한 다른 전사들과 싸워, 서로의 가능성이 가진 힘과 세계의 조각을 빼앗아 자신의 세계를 채워야만 한다.

싸우지 않는다면 싸우지 않는 대로 그 전사의 세계 또한 빼앗겨버리고 만다.

그것이, 리즈로서는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인형이 받은 제안이었다.

이제는 리즈에게도 제의된 전쟁이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실, 리즈는 오로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부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과 같은 세계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살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겨우 손에 넣은 두 번째 삶을 순순히 빼앗길 생각도 없었다.

리즈는 ‘이 세계’에서 만난 스톰라이더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와, 그 일행을 포함한 지금 이 세계의 모두도, 리즈가 싸우지 않는다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원래부터 없던 것’이 된다.

그것이, 리즈가 인형의 말을 이해한 후 내린 또 다른 결론이었다.

 

리즈의 분노는 언제나 당연하게 덮쳐 오는, 당연하지 않은 불가해의 재난으로부터 솟아올랐다.

어른이 되고도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자신의 분노.

그 분노를 품은 채, 십대의 초반부터 지금까지 쭉 싸워왔다.

분노의 원인을 이해하기 전에는, 스스로가 끝없는 싸움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싸움 자체는 이제 와서 리즈에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좋아, 오히려 내게는 반가운 일이다. 싸움이라면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니까. 그 제안, 받아들이지.”

“정말인가요? 이번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물이 아닌 부활한 전사들끼리의 싸움입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상대와 싸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건 너다, 인형. 그리고 내 지시자로서 함께 여행해왔으니 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리즈는 그 때까지 쭉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지금 당장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땅에 내려두고, 천 꾸러미를 풀어 그 안에 있던 셉터를 꺼내 쥐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거다. 내게 덤벼온다면 그 무엇이든.”

그와 동시에, 리즈에게서 솟아오른 불꽃이 공간을 통째로 살라버릴 듯이 타올랐다.

“나를 새로운 전장으로 안내해라, 인형.”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