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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imus

고장

 

Re1 3384년 [LogTitle : RESTORE]

 

 

 

“정신차려! 어이! 죽고 싶은 건 아니잖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으으…”

머리가 지끈거리는 동시에 얼굴 위쪽이 불로 데인 듯이 아픈 와중, 그 목소리가 계속해서 꺼져 가려는 나의 의식을 붙잡듯 말을 걸고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시설에 도착한다고! 제발! 그 때까지만…….”

부대 내에서 늘 긍정적인 편에 속하는 남자였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평소의 밝은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나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듣고 있는 거지! 또 기절하면 안 되니까 억지로라도 대답하면서 정신 차려!”

“나는…….”

“잠깐, 말하지 마! 리즈가 겨우 지혈해놓고 갔는데 상처가 또 터지면 큰일 난다고!”

대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 윽박지른 직후에 곧바로 코르벳의 운항 속도를 탓하며 이 자리에 없는 엔지니어들에게 욕설을 뱉는 것을 보니 그가 자신보다 더 혼란스러운 상태구나 싶어 도리어 이쪽이 침착해졌다.

 

코르벳을 지키다가 용인의 공격에 상처를 입고 쓰러지게 된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프고 어지럽기는 했지만 더 이상 피가 흐르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로 지혈이 된 모양이었다.

코르벳의 응급처치용 장비로 이 정도의 상처는 지혈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스스로 내 상처를 볼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처를 지혈했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자 어떻게 된 일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상처를 입었던 곳이 내내 데인 듯이 뜨겁게 느껴졌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돌아가면 어떻게든 살 수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살렸을 그 남자는 이 코르벳에 타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쓰러진 곳은 분명 코르벳 내부였으니, 내 상처를 지혈까지 했다는 그가 뒤쳐져서 코르벳에 타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리…….”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알기 위해 코르벳을 필사적으로 조작하는 남자에게 다시 말을 걸었으나, 대답은커녕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무스!”

“…….”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전 E중대였던 남자가 보기 드물게 목소리를 높여 나를 부르고 있었다.

“또 여기 있는 거여?”

사투리를 억누르지 않는 남자의 말에 나는 말없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익숙한 듯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밀그램 부장님이 여기 오래 있으면 안 좋다고 했잖여.”

남자의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곧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슷한 눈높이에 있던 묘비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가장 뜨거웠던 남자는 가장 차가운 이 땅 아래에 시체조차 눕히지 못하고 사라졌다.

물론 연대의 수많은 묘비들 중 하나일 뿐인 이 돌덩이에 그런 감상적인 문구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런 종류의 말을 입에 담기는커녕 생각하는 일도 없던 자였다.

나를 구하고 소용돌이 너머로 사라져 간 남자도, 늘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긴 했지만 수다스러운 것이나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시체도 품지 못한 채 이름과 생몰년도만 덜렁 새겨진 묘비는 너무나 휑해서 그런 문구라도 새겨 넣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고, 나를 부르러 온 남자를 따라 나섰다.

 

“무리는 허지 말어.”

남자의 시선은 내 얼굴에 닿아 있었다. 내 목숨을 건진 화상 흉터는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눈가를 가리는 가면 아래에 가려져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곁에는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를 걱정하는 듯한 태도였다.

“바람이 잘 통하게 해야 한다고 의료동의 엔지니어도 말했었잖아. 이제 그 녀석들 말은 물이 젖어있다고 해도 안 믿기지만 말이야.”

원래 자신에게 자주 말을 걸던 남자가 사라지자, 이제는 그와 가깝게 지내던 자들이 다가와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걱정을 사기 쉬운 타입의 인간인 것일까.

몇 년 전만 해도 관심을 받으면 목적에 방해가 되었기에 성가셨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렇게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어쩐지 조금 불편해진 감정을 추스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디 아이 공략은 실패했다. 작전에 참가했다 돌아온 자는 E중대와 A중대에서 각각 단 한 명씩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나는 빈사상태까지 갔으나 출혈을 제 때 멈추게 한 덕에 후유증은 남았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중대의 유일한 생존자 역시 중상인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심각한 상태였으면서 나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필사적이었던 거였나.

그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코르벳 안에서 의식을 잃기 전까지 듣고 있었던 그 필사적인 욕설이,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재미있게 느껴졌다.

덕분에 의료동에서 치료를 받고 상처가 다소 호전되고 난 후 나를 찾아온 그 남자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와서, 이번엔 엔지니어가 아닌 나를 향해 화를 내는 남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의료동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보고 듣는 것은 모두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그래서 치료가 끝난 후 일시적으로 연구동에 배속될 거라는 소식은 다른 자들에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희소식으로 다가왔다.

연구동이라면, 의료동보다 더욱 쓸모 있는 것들을 많이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 소식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 연구동으로의 배속은 복귀 훈련을 겸해 능력발현에 관련된 연구에 협력하는 형태이기에, 이능을 발현한 E중대만 해당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자리에서 물어봤지만, 엔지니어들은 대답하지 않고 말을 넘겨 버렸다.

계속해서 치료를 받으며 상태를 회복하고 있기는 했지만, 엔지니어들은 원래부터 E중대 소속이었던 대원들과 디 아이 공략을 위한 재편 직전까지 A중대 소속이었던 나를 미묘한 격차를 두고 대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능을 발현한 그들과 발현하지 않은 나의 처우가 달랐다. 아마도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 것일 터였다.

‘내’가 겪은 과거에도 그랬듯, 모든 지상의 인간들을 움직이는 장기말로 취급하는 그들의 태도에 나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우습게도 그런 나를 위해 나선 것은 E중대 소속 대원들이었다.

원래도 그다지 좋지 못했던 그들에 대한 대우보다도 더 형편없는 나에 대한 취급을 알자마자 엔지니어들에게 항의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발끈한 것은 나를 데리고 코르벳으로 귀환한 남자로, 그와 자주 함께 다니던 과묵한 남자도 특이한 억양으로 내가 보아 왔던 것 중 가장 많은 말을 하며 동조했다. 둘 모두, 그 남자와 가깝게 지내던 자들이었다.

“이 자는 아직 완치되지 않았다. 연구 협력은 물론이고 복귀 훈련도 무리다. 화상조차 다 낫지 않았으니, 좀 더 치료에 전념해야 해.”

“그럼 그 치료가 끝나면 어떻게 되는데!”

“그걸 너희가 알 필요는 없다.”

시종일관 딱딱한 태도로 제 할 말만 늘어놓은 엔지니어는 이내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남겨진 E중대의 대원들은 각자 화를 내거나 나를 위로했다.

“역시 엔지니어 녀석들은 재수가 없어.”

“어이, 막시무스! 우리가 연구동으로 간 사이에 제대로 회복해서 빨리 복귀 훈련에 참가하라고! 무려 이 몸께서 몸소 구해온 네가 이런 곳에 이렇게 오래 박혀있어서 되겠냐!”

“사실 처음에 디노가 막시무스를 구해 데리고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땐 ‘반대 아냐?’라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너무하네!”

그러다 어느새 마치 디 아이로 떠나기 전처럼 왁자지껄 저들끼리 떠들고 있는 그들을 보자, 새삼스럽게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환자 있는데 시끄럽게 떠드는 거 아녀.”

결국 그동안 한 발짝 떨어져서 나를 살피던 남자가 제동을 걸고 나서야 그들은 입을 다물고 나중에 보자며 내가 있는 치료실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몸조리 잘 혀… 해라.” 하고 인사를 남긴 남자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언제 시끌벅적했냐는 듯이 적막해졌다.

 

치료가 끝나고, 복귀훈련에 합류할 수 있게 된다면 다시 방금처럼 떠들썩한 매일을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곤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감겨 새까맣게 변한 시야 속에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묘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될 것과 어떻게든 잊고 싶었던 것을 동시에 손에서 놓아 버린 기분이었다.

‘되찾고 싶어?’

문득, 내 안에서 내 것이 아닌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다. 내가 한 생각은 아니지만, 동시에 ‘나’의 생각도 아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지만, 어쩐지 이전에 몇 번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나’의 것이 아닌 이 생각을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 정말로 내가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리고 되찾아야만 한다면.

‘되찾고 싶다.’

그렇게, 나의 기억 속에서는 처음으로 또렷하게 바란 소망과 동시에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Re2 3381년 [LogTitle : BLOT]

 

 

 

눈을 떴을 때, 갑갑한 느낌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지가 침대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채로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자, 엔지니어들이 디지털 이미지가 띄워진 모니터를 보며 뭔가 의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들을 발견한 것과 동시에 그들도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대화를 멈추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깨어났군. 지난 검사 데이터에 특이사항이 있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져, 재검사를 한 참이다.”

검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연구로 느껴졌지만, 나는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엔지니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엔지니어도 내 대답 따위는 애초부터 신경쓰지 않은 것인지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의 두뇌에서 케이오시움 오염의 징후가 발견되었다. 성기사의 힘이 발현한 다른 대원들은 두정엽과 후두엽에서 오염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자네는 특이하게도 대뇌가 아닌 소뇌의 케이오시움 오염 농도가 높더군. 그래서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엔지니어가 뭔가 길게 말했지만, 애초에 허락된 정보가 적은 일개 오퍼레이터일 뿐인 나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이런 경우는 완전히 처음이라, 아무래도 연구가 필요할 것 같군. 자네도 자네의 몸에 일어난 이상이 신경 쓰일 테니 우리를 믿고 따라와 주면 좋겠어. 원인과 그 영향을 반드시 밝혀내주지.”

엔지니어들의 신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나의 몸에 일어난 이상을 밝혀낼 확률이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엔지니어들이 지금 내게 한 제안은 나를 연구동에 데려가 주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말 그대로 호의에 의한 것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연구동에 갈 수만 있으면 되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지금처럼 계속 구속되어있을 수는 있지만, 난동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그럴 확률은 낮았다.

지금 당장은 온 몸이 구속되어 있어 움직이기 불편한 몸이었지만 고개 정도는 끄덕일 수 있었다.

협조적인 내 반응에 엔지니어들은 만족한 것 같았다.

“좋아, 그럼 혹시 지금 특별히 느껴지는 몸의 변화는 없나?”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그랬지만, 딱히 느낀 것은 없었기에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새롭게 발견된 케이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내 몸이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건지, 엔지니어는 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묶여 있는 침대 옆에 세워진 콘솔에 뭐라고 써 넣었다.

“협조해줘서 고맙군. 다시 자고 일어나면 연구동일 거야. 그때 다시 보지.”

그때, 먼저 연구동으로 배치된 다른 대원들이 생각났다.

그들에 대해 물을까 말까 망설이던 사이, 엔지니어는 병실의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묶인 채였기 때문에 엔지니어를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내야만 했다.

 

‘나’에게 있어 그들의 행방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다시 그들과 함께 싸울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애초에, 나의 본연의 목적은 이계의 생물들과의 전투가 아니었다.

단지 목적을 위해 이곳에 머무르려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연대에 속한 일개 대원들의 신병 또한 내 임무에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그들과 등을 맞대고 싸우고 싶다’같은 생각은 ‘나’의 목적에 하등 쓸모가 없는 잡념일 뿐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이 상념에 빠지는 것밖에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더 이상 불필요한 행동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잠에 들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일어나면, 연구 협조를 하는 척 하며 엔지니어들의 여러 정보들을 입수하는 데에 바빠 쓸데없는 생각을 할 틈은 없게 될 것이다.

아니면 연구동에서 재회할 확률도 높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연구 협조가 끝나면 원래의 전투 임무를 맡아 돌아갈 테니, 그때까지 그들이 살아 있다면 어쨌든 만나게 될 것이다.

판단 끝에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가상 시뮬레이션을 재개합니다.”

온몸에 전극 장치를 붙인 채 쓰러져 있던 나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고 일어섰다.

시뮬레이션이라고는 해도 몸을 움직이는 강도는 원래 하던 훈련이나 임무에서의 전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가상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기계적인 음성이 끝나자마자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강철 거인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웬만큼 뛰어난 실력의 대원이라도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버거운 상대이지만, 연구에 협조하는 내내 나는 이런 가상의 이형생물들과 줄곧 혼자서 싸우고 있었다.

이제는 다소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버거운 것은 마찬가지여서 가상의 전투는 십중팔구 나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이 모든 전투가 실전이었다면 나는 몇 번이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시뮬레이션이라고는 하지만 몹시 불쾌하고 싫은 기분이 들어서, 그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일을 이미 몇 번이고 겪은 적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시감도 나의 불쾌감에 한 몫 했다.

“집중해 주길 바라네.”

엔지니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거세게 내리쳐 오는 강철 거인의 공격을 양 손의 검으로 흘려냈다.

흘려냈다고는 하지만 데이터 상으로 내 손목에 가해진 충격은 무시무시했다.

충격에 의한 경고음 때문에 관자놀이 부근과 함께 얼굴의 흉터까지 지끈거려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엔지니어들이 있는 쪽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쪽 방향에서만 건너편을 볼 수 있는 구조의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어, 그 너머에 있는 엔지니어들이 어떤 표정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는지, 혹은 지켜보고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혹독한 시뮬레이션을 연속으로 치르는 이유는 ‘성기사의 힘’은 치열한 전투 중에 발현하기 쉽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케이오시움에 의한 뇌의 오염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힘이 나타나는 원인이기는 했지만, 처음 발현할 때는 대부분 치열한 전투 중에 각자의 강한 의지가 트리거가 되어 개인마다 다른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 능력은 ‘성기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성향이다 당시의 상황 등에 따라 결정된다.

아직 이에 대한 연구가 그렇게 많이 진척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레지멘트의 연구자들이 내놓은 연구결과도 이 정도로 정리될 수 있었다.

물론 이 또한 많은 가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가설이지만, 지지하지 않는 연구자들도 있어 반박하기 위한 실험도 진행 중이라고 했다.

데이터 상으로는 이미 오염되어 있지만 아직 ‘성기사의 힘’은 발현되지 않은 나 또한 그 실험을 위한 실험체 중 하나였다.

대놓고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고난이도의 시뮬레이션이 반복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추측할 수 있었다.

다만, 연구자가 아닌 오퍼레이터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실전과는 차이가 있어 그다지 유효한 실험은 되지 못했다.

아무리 치열한 전투라도 상대가 홀로그램이라면,

‘피곤하군.’

‘오늘의 실험은 언제 끝나는 거지.’

‘연구동의 모든 장소를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는 능력이나 생기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가상의 이형생물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패배를 반복하게 되는 이유 중에는 이런 잡념이 섞여드는 탓도 있을지 몰랐다.

단순히 오퍼레이터인 나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차라리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 후 실전을 겪는 편이 나아 보였다.

그러나 내게는 의견을 말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엔지니어들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싸울 뿐이었다.

“시뮬레이션을 중지합니다.”

그때, 기계음이 나며 눈앞에 있던 이형생물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방금까지 듣던 것과는 다른 기계음이 들렸다.

“이 실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수고했다. 방에 돌아가 기다리고 있으면 다음 지시를 전달하겠다.”

무뚝뚝해 인공지능과 다를 바 없는 어조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묵묵히 몸에 붙인 전극을 조심스레 떼어 내고 방에 돌아갔다.

이 연속 시뮬레이션 실험에서 아무런 가능성도 보지 못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이제는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연구동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었기 때문에, 그다지 아쉬움을 느끼지 않으며 휴식을 취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때 그렇게 헤어져버렸던 대원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실험을 당했던 것일까.

시뮬레이션이 힘들었다며 투정에 가까운 불만을 쏟아내는 초록머리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스스로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Re3 3382년 [LogTitle : ESCAPE]

 

 

 

구속복과 침대, 그리고 용도 모를 콘솔밖에 없을 방 안은 엔지니어가 들어와 있지 않을 때면 언제나 불빛 하나 없이 깜깜했다.

어둠은 때로 효과적인 속박 장치가 되기도 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 상황을 직접 겪게 되는 것은 또 달랐다.

나는 손끝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그저 기시감과 함께 나를 내리누르는 불쾌감을 떨쳐내려 애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시뮬레이션을 통한 능력 발현에는 실패했지만, 엔지니어들이 나를 구속하기 위해 사용한 장치는 다른 ‘성기사의 힘’을 가진 대원들에게 사용하는 것과 같은 종류 같았다.

다른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의 범주 내에서는 뛰어난 수준의 신체능력을 가진 나로서도 이 구속을 풀 수는 없었다.

그렇게 묶여 있는 채로,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도 모른 채 누워만 지냈다.

그동안, 내가 이곳에 구속당해 있는 이유를 고민했다.

분명히 협조적인 태도였는데도 나를 가둔 것은 내게서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왜 곧바로 제거하거나 원래의 임무로 돌려보내지 않는 것일까.

엔지니어들의 성정은 ‘나’의 경험으로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쓸모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대우가 달라진 것은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나를 어떻게도 처분하지 않고 계속해서 가둬 두고만 있다는 사실이었다.

혹은 이 또한 실험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건지도 추측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식사를 포함한 생리현상을 모두 구속 장치와 연결된 생명유지 장치를 통해 강제로 해결당하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내가 처해있는 상황은 간단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나가고 싶어?’

그때, 머릿속에서 나의 것이 아닌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생각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굉장히 닮은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디 아이에서 귀환한 후 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생각이 멋대로 떠오르는 일을 이미 한 번 겪었다는 것을 떠올려냈다.

머릿속에 들어온 불청객 같은 생각은 계속해서 멋대로 떠들어 댔다.

‘나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다시 죽게 될 거야. 그리고 또 한 번 꼭두각시가 되겠지.’

‘나는 당신 편이야, 막시무스. 당신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가게 해줄 수 있어. 같이 이곳에서 나가자.’

‘…어떻게?’

‘간단해, 자아.’

상냥하고 나긋한 목소리처럼 느껴지는 그 불청객은 나와 대화하며 가볍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나를 결박하고 있던 장치들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방금 일어난 일에 잠시 당황해 순식간이 자유롭게 된 몸을 움직였다.

언제 구속당했었냐는 듯, 나의 몸은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혹시, ‘성기사의 힘’은 이미 발현되었지만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것뿐인 것일까?

하지만 소용돌이에 진입했던 ‘우리’중 그 누구도 지금 같은 힘을 손에 넣지는 못했었다.

의문을 품으며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솟아올랐던 내 것이 아닌 생각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붙잡혀 버릴 것이다.

사실 이미 내 쓸모는 다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손 놓고 처분을 기다리기에는 이유 모를 거부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살고 싶다.’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무작정 방을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헐렁한 실험복을 입은 채로 연구동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손에 든 것은 우연히 발견한 훈련용 셉터 두 자루였다.

딱히 추격은 없었지만, 그것은 이곳에서 몰래 나갈 수 있는 길이 없다시피 해서일 것이다.

늘 지키는 사람이 있는 통상의 출입구 외에, 물자의 반입에 사용되는 지하통로.

그곳도 자신의 구속 장치가 사라져 경보음이 울린 지금은, 분명 누군가가 지키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갈 수밖에 없었다. 셉터를 발견한 것도 단지 우연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일단 가보면 어떻게든 될 것만 같았다.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지하통로, 단지 안개만 자욱하게 깔린 공간으로 조심히 발을 내딛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이곳에는 엔지니어들이 배치한 드론을 포함해 매복해 있는 경비 인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멈춰!”

예상한 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공격이 찔러들어져 왔다.

나는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해 공격을 흘려 냈다.

구속되기 전, 연구동에서 한참동안이나 혹독한 시뮬레이션을 반복했기 때문일까.

나는 그전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기습을 받아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뮬레이션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이형생물로,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같은 연대 소속의 대원일 상대를 상대하는 일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상함을 느낄 틈도 없이, 두 번째의 공격이 날아왔다.

빠르게 공격을 막고 뒤로 물러나자, 나를 상대하는 자들의 윤곽을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총 두 명,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도주를 목표로 한다면 가능성은 있었다.

다만, 혹시 상대 중 하나라도 ‘성기사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대응은 까다로워진다.

경계하며 상대를 살피는데, 두 사람 중 하나의 실루엣이 움찔했다.

공격을 하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회피할 만한 공간을 눈으로 훑는데,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이어졌다.

“…막시무스…?”

“……?”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움찔했던 실루엣의 상대가 나를 알아보았고, 더해서 동요했다. 덕분에 빠져나갈 빈틈 또한 눈에 보였다.

후자의 사실이 더욱 중요했던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그 빈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이, 이데리하!”

그와 동시에, 나머지 하나가 내 쪽으로 검을 뻗으며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맞지는 않았으나, 그 이름을 들은 나도 동요하고 말았다.

어느새 안개는 옅어졌고, 내가 빈틈을 통해 가까스로 빠져나가 위치가 바뀐 나와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디 아이에서 나를 구했던 남자와, 그곳에서 함께 싸우지는 못했지만 한때 그러기로 예정되었었던 남자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내가 입은 실험복과 나의 얼굴을 오가고 있었다.

“그 자는 연구동에서 도망친 위반자다. 멍하니 있지 말고 체포해!”

두 사람이 가진 무전기에서 주인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뒤돌아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 거기 서!”

안개가 다시 짙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이 안개는 저 둘 중 한 명의 ‘힘’에 의해 생성된 것이다.

지금 ‘성기사의 힘’을 가진 상대와 맞서 싸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도망쳐서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안개 속에서, 저 앞에 수로의 출구가 보였다.

저곳을 통하면, 시설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나간다고 해서 딱히 갈 곳은 없었지만, 일단 이 곳에서는 나가야만 했다.

강한 공포와 거부감에 떠밀려 나는 출구로 이어지는 문에 가 닿았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셉터로 잘라낼 수밖에 없어 보였다. 막 잘라내기 위해 검을 치켜드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냐, 막시무스! 넌 그럴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내게 라이플을 겨누고 있는 상대에게,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단지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문을 막고 있던 자물쇠가 검격에 썰려 나갔다.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런 짓은 옳지 않아!”

‘무슨 짓?’

반발심에 가까운 의문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어깨에 총탄이 스쳐 지나갔다.

총탄이 몸에 닿은 순간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상용은 아니지만, 그 대신 상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데에 중점을 둔 무기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검을 놓지 않았다. 총탄에 의해 상처를 입는 순간, 내 안에서 불꽃이 이는 기분이 들었다.

‘저 두 사람, 당신이 나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어.’

그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를 지배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두컴컴한 지하수로 안에서 천천히, 검이 들어 올려졌다.

 

Re4 3382년 [LogTitle : IDEAL]

 

 

 

당혹과 혼란.

나를 향한 시선들에는 그런 감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자들과 다시 만나는 것을 바랐지만, 이렇게 재회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신체능력이 우수할 뿐 그 어떠한 ‘성기사의 힘’도 발현하지 않았던 나의 몸이 내게 겨누어진 창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창을 들고 있는 자에게 달려들어 급소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그래, 당신 또한 ‘그’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존재. 나는 당신의 그 의지를 원해. 모든 것을 내팽개쳐 버릴 만한 광기와 변하지 않는 의지….’

검 끝이 상대의 급소에 닿기 직전, 또다시 머릿속에서 상냥한 목소리처럼 들리는 생각이 느껴졌다.

분명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는 그 말이, 이제는 마냥 상냥하게 들리지 않았다.

흥미와 즐거움.

내 것이 아닌 생각에서 명백하게 느낀 감정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싸늘한 뭔가가 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찔러 넣던 검격을 멈추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나를 향해 겨누어졌던 창은 내가 달려드는 순간 방향을 바꾸었는지, 나에게는 가볍게 긁힌 상처밖에 남지 않았다.

“이데리하, 괜찮아?!”

“…내는….”

자신의 동료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남자는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워 하는 눈으로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침묵.

이미 그들과 나 모두, 무기의 끝을 바닥으로 향한 채였다.

나는 어느 순간, 지금 나의 머릿속에는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또한,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사라진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때 ‘나’였던 ‘그’를 마치 남을 칭하듯 부르고 있는 내 자신에게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어쩐지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내 말을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검 끝을 내린 채 우선 그렇게 말했다.

수단을 가려 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부추김에 따르고 싶지 않다는 나의 의지가, 나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동시에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저, 엔지니어들에게 부당한 억류를 당해 탈출했을 뿐이다. 정말로, 그것뿐이다.”

내 말을 들은 그들은 진위 여부를 판단하려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들도 나처럼 판단 권한이 없는 위치일 것이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아주 잠시뿐이라면. 다시는 이들과 함께 나란히 검을 쥐고 서는 일이 없게 된다 하더라도….

“…밀그램 부장님. 정말입니까?”

“…….”

“부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겪었던 일을… 막시무스도 같은 일을 겪었다면, 저희는….”

뜻밖에도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를 변호했다.

그러나 나는 곧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연구동에서도 나를 위해 엔지니어들에게 화를 냈던 자들이다.

그리고 저들 중 한 명은 디 아이에서 빈사 상태에 이르렀던 나를 구해오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내가 겪은 것과 비슷한 다른 일이 있었던 듯했다.

무전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치직거리는 소리만 나다가, 이내 아까 명령을 내린 자와는 다른 사람의 “내가 그 쪽으로 가지, 조금만 기다려.”하는 말소리만 들리고 끊겨 버렸다.

대답한 남자는, 아마도 부장이라 불린 남자일 것이다.

알고는 있는 이름이었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풀기에도 꺼려졌다.

나는 긴장하며 검을 고쳐 쥐었지만, 두 사람은 내게 괜찮으니 걱정 말고 기다려 보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공격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아서, 나도 전투 자세를 풀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긴장은 풀지 않은 채로, 기묘한 대치상태를 유지한 채 나와 그들은 잠시동안 서 있었다.

이윽고 한 남자가 통로의 반대쪽 끝에서부터 다가왔다.

두 사람이 경례를 올리는 사이, 나는 남자의 기색을 살폈다.

“오랜만이군, 막시무스.”

“…밀그램 부장.”

“나를 경계하는 모양이군.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내 표정을 본 남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역시 막시무스도….”

“…그런 것 같더군. 내 불찰이야. 너희가 그런 일을 겪었다면, 막시무스도 같은 수순을 밟는 게 당연했을 텐데. 어째서….”

“…막시무스는, 정말로… 위반자가 아닌 겁니까?”

“그래. 내가 여기 오기 전, 확인하고 왔어. 엔지니어 녀석들은 발뺌했지만…. 정황이 확실하더군. 정확히 말하자면, 막시무스가 그곳에 감금된 것부터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대기실로 그를 데려가도 괜찮습니까? 상처를….”

창을 들고 있던 남자가 그렇게 말한 동시에 나를 향해 총을 쏘았던 남자가 황급히 달려왔다.

“미안하다, 막시무스! 이 몸이 오해해버려서… 뒤의 일은 이 몸한테 맡기고 등에 업히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다가와 뒤돌아서서 등을 내미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발바닥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연구동에 감금되어 있을 때 입고 있던 실험복 차림 그대로 뛰쳐나왔기 때문에, 신발도 챙겨 신지 못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날카로운 돌조각이라도 밟아 베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바람에, 깨닫지 못한 것이다.

“빨리 가서 발도 치료할 수밖에 없겠네! 자, 어서 이 몸한테 업혀!”

재촉하는 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디 아이에서 돌아오던 콜벳 안에서의 일이 떠올라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대기실’이라는 곳에 가서 간단한 치료를 받으며 들은 이야기는 꽤 충격적인 것이었다.

나보다 먼저 연구동으로 배속 받았던 다른 E중대의 대원들도, 결국 나처럼 감금되고 만 모양이었다.

다행히 부장의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그 후로는 소용돌이 임무로 파견되지 못하고 이곳에서 규율을 어긴 ‘위반자’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했다.

그 규율 중에는 내가 모르는 것들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실패한 디 아이 공략 작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긴 보급을 위한 엔지니어 측 인원을 제외한 전 대원들의 사적 외출 금지 같은 것들이었다.

나 또한 탈출하며 소란을 피운 일을 면책 받고 다시 억류되지 않는 대신에 시설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그들과 같은 임무를 맡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부장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인 것 같았다.

연대 내에서의 엔지니어들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라는데, 그것을 감안해 생각하면 귀환 후부터 지금까지 쭉 받고 있는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서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시설이 세워지는 데에 협력을 했던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혹시, ‘그’에게 있어 이곳은 나와 함께 쓸모를 다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떠오르는 것과 함께, 규율 위반자를 체포하는 임무가 왠지 익숙하고, 이미 해보았던 일처럼 여겨져서 자꾸만 불쾌해졌다.

“자네도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아무래도 엔지니어들은 자네들을 시설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아.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아직까지 다른 대원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일은 ‘우리’가 원인을 알아내어 해결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우리’ 중 일부 개체를 잃는 것쯤은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

“…배려 감사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 혼자 해결해야만 했다. 동시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나를 잃지 않아야만 했다.

내가 살아있기 위한 나의 의미를 이제는 ‘나’의 입장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가, 이 자들이 살린 목숨이었다.

소용돌이에서 돌아오지 못한 그가, 그들이 살린 목숨이었다.

그러니 허투루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유를 따지기 이전에 살고 싶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동안 나 또한 아직 살아있는 이들을 지켜보고 싶었다.

이런 것이 동료라는 것인가, 하고 멍하니 깨달았다.

“다시 함께구나, 다행이다! 언젠가 원래의 임무로 돌아가서, 그 때야말로 디 아이를 없애 버리자고! 이 몸께서 활약해 주지!”

“좋아, 그 때는 우리도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테니까.”

“그래, 역시 디노를 보내놓고 뒤에서 쉬기만 하는 건 너무 불안하니까 말이야.”

“어이, 그건 무슨 뜻이야!”

“…….”

꼭 예전처럼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이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원래도 과묵한 남자였지만, 지금은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그는 내가 말을 걸자 놀란 것 같았다.

나 또한 원래는 그와 비슷하게 다른 사람들과 엮이는 것을 피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사투리를 억누른 정갈한 표준어의 대답은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다. 그 대답의 내용을 생각하면, 잠깐의 침묵은 없는 것으로 치고 거침없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정말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동료들의 희망을 깨고 싶지는 않으니까,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내 말에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기야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일 터였다.

“그래… 하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다른 길은 없으니까.”

“아니,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엔지니어들의 동향에 대해 따로 알아보려고 한다.”

“…뭐여?”

이어진 내 대답에 이번에는 확실히 놀란 듯, 숨기지 못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떠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혼자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혼자’가 되고서야 알게 되다니,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없이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큰 건 요구하지 않아. 하지만 그 크지 않은 도움이, 내겐 없으면 안 돼.”

 

 

Re5 3386년 [LogTitle : DISTORTED]

 

 

 

나는 어두운 터널 안을 걷고 있었다.

이 터널은 마치 시설 바깥으로 나가는 지하통로의 수로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장소였다.

애초에 이것은 시설에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다른 E중대의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외부로 나가는 것이 금지된 내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데리하와 믹을 비롯한 동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들은 내가 종종 시설에서 나갈 때마다 흔적을 지워주거나 입을 맞춰 거짓 진술을 하는 식으로 내가 기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것처럼 꾸며주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늘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자주 나가는 것도 위험했기 때문에 조사 속도는 느렸지만, 그래도 끈질긴 조사 도중 중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연대 내의 엔지니어들은 어떻게든 숨기고 있었기에 바깥에서만 알 수 있는 정보였다.

그것은 세계를 지키기 위한 조직인 《레지멘트》의 사람들에게는 꽤나 충격적일 이야기였다.

디 아이의 공략이 실패한 이후로, 세계의 일부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사라진 세계의 일부는, 사실 일부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시설로 돌아온 후 알아낸 것을 기다리고 있던 일부 동료들에게 알리자, 예상대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충격에 오래 빠져 있지는 않았다.

“…내 고향은, 옛날에 이미 소용돌이에 먹혀 사라졌응께… 그래도 이젠, 흔적도 안 남았겠구먼.”

“이해가 안 가는군. 이제 소용돌이 말고도 정체모를 뭔가와 싸워야 하는 거야? 엔지니어 녀석들은 이런 사실을 숨겨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 젠장…”

이데리하와 믹이 각자의 태도로 중얼거렸다.

내가 밖으로 나다니는 것을 알고 돕는 것은 지금은 이 둘뿐으로, 디노나 바실리오는 혈기왕성한 편에 속했기에 비교적 냉정한 믹이 아직은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데리하와 나도 동의했기에 그들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계획은 그들도 포함한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것도 디노나 바실리오에겐 아직 비밀로 해야겠군. 분명 일상생활도 유지하기 힘들 만큼 괴로워 할 거야.”

“…그렇, 겄제….”

디노 같은 경우에는 고향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인페로다 부근의 황야였지만, 소용돌이 말고도 또 다른 정체모를 위협이 나타났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스톰라이더 일족인 만큼, 황야를 방황중인 그의 가족들의 현재 행방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알리기 힘들었다.

“…네 고향은, 괜찮은겨…?”

장벽으로 보호되는 도시가 많은 제국에서도 사라진 땅이 꽤 있었다는 말을 들은 이데리하가 나에게 물었다.

내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고향이라는 것은,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일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지금의 내게 크게 와 닿는 장소는 없었다.

‘그’가 자랐던 방도, 수많은 기계와 캡슐을 비롯한 설비들이 늘어있었던 황제의 묘도 사라진 땅에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고향을 잃었다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다만, 이 연대의 기지는 여전히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소로서 남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그래서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알아내야 할 것은 더욱 많아졌지만 당연하게도 엔지니어들의 도움은 바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갈 때마다 전보다 더욱 분주하게 돌아다녀야만 했다.

이 어두운 수로 안을 걷고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이 수로는 저 옛날 황금시대에 만들어진 장소로, 뭔가 도움에 될 만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황금시대의 유물인 «코덱스»를 발견한다 해도 우리가 가진 기술력으로 해독하는 것은 무리일 가능성이 컸지만, 일단 손에 넣기만 한다면 그 다음 수가 생길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수로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다.

수로 끝의 공간에는 비밀장치로 숨겨진 문이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며 장치가 망가져 비밀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나는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한눈에 보아도 이 시대의 것이 아닌 기계가 있었다. 모니터가 달리지 않은 콘솔 같기도 했는데, 조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투박한 레버 하나가 다였다.

기계로 다가가 레버를 조심스레 건드리자, 레버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찰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반대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혹시나 새롭게 열린 비밀 공간 같은 것이 있는지 살폈지만 결국은 허탕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피로한 기분이 되어 그 장소에서 돌아 나왔지만, 위치는 잊지 않았다.

언젠가 또 이 장소를 찾을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시설에서 며칠 거리인 그 황금시대의 수로에서 귀환해 이데리하와 믹이 지하 통로의 경비를 담당하는 시간대를 골라 돌아왔을 때, 그곳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였다.

지금 마주치면 곤란한 다른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우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데리하가 펼쳐둔 것인지 안개도 자욱하게 끼어 있어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안 된다니까, 밖으로 나가는 건 금지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놀림거리가 될 거라고요!”

“누구한테?”

“두 기수 위의 녀석이요.”

“뭐어? 그런 싹퉁머리 없는 선배가 있단 말이야? 대체 누가 가르쳐서 그렇대?”

“그… 저는 모르지만 하우즈란 사람이랑, 지금은 프리드리히 교관인데요.”

“…문제아 훈련생이 꼭 문제아 교관 아래에서만 나오란 법도 없지! 아무튼, 나가는 건 안 돼. 규칙 위반이야.”

지하 통로로 시설 밖으로 나가려던 훈련생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릴 훈련생을 앞에 두고 곤란해하는 디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엔지니어들에 의해 불합리한 수준으로 까다로워진 규칙도 문제였고, 또 그들에 의해 터무니없이 처분될 뻔한 나의 사례가 몇 년 전에 있었기 때문에 포박 부대의 대원들은 가벼운 규칙을 어겼거나 어린 위반자들은 웬만해서는 체포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예 눈감아 줄 수는 없어서,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런 상황 같았지만, 타이밍이 나빴다.

나는 훈련생이 포기하고 돌아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 훈련생은 꽤 고집이 셌다. 결국 디노는 한 발 물러섰지만, 포박 부대의 방식으로 물러섰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그 두 기수 위의 녀석에게 지하통로를 지키는 무시무시한 베테랑 선배와의 정정당당한 결투를 통해 쫓겨났다고 해라! 다른 녀석도 아니고 이 몸과 결투를 했다면 충분히 명예롭지. 증거품은 이걸로 하도록 해.”

내가 숨어 있는 곳에서는 목소리만 들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디노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훈련생도 단념한 듯했다. 곧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고, 통로에 아무도 없게 된 것을 확인한 나는 통로를 지나 거주 구역으로 돌아왔다.

 

한 번 나갔다 올 때마다 다음 행선지를 정하고 생각을 정하거나 의견을 나누는 등으로 한동안은 연대에서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며 시설에 머물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지하통로의 정해진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통로로 진입했다는 연락이 왔다.

어떻게 돌려보내야 하나 고민하며 기다리는 사이 스스로를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나타난 것은 금발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밖으로 나갈 생각 따위 없는 것처럼 통로 가운데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는 이내, 커다란 목소리로 통로가 울리도록 외쳤다.

“저기, 저랑도 싸워 주세요!”

“…바-보. 그런다고 나오겠냐?”

“그럼 어떻게 해야 나오는데?”

“저기 출구로 뛰어가서 밖으로 나가봐. 그럼 바로 뒷덜미 잡혀서 징벌방으로 끌려갈걸.”

“난 징벌방에 가려고 온 게 아니라고!”

“너 말고 여기 왔던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겠지.”

금발의 청년 뒤에는, 자줏빛 머리카락의 청년이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둘은 아마 동기인 듯했다.

그들은 나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이곳을 지키는 포박부대의 대원과 싸워보고 싶은 듯 했는데, 아마도 며칠 전 이곳에 왔다가 디노에 의해 돌려보내진 훈련생에게서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온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어울려줄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함께 대기 중이던 이데리하에게 속삭였고, 나의 말을 들은 이데리하는 미묘한 표정이 되었지만 내 의견에 따라 정신을 집중하고 ‘성기사의 힘’을 사용했다.

그가 집중한 것과 동시에, 통로에 있는 수로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나와 허공에 글씨를 만들었다.

‘돌아가’

그 글씨를 보자마자 금발의 청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고, 다른 청년은 배가 찢어져라 웃기 시작했다.

“야, 너랑은 안 싸워준대.”

“그런 게 어디 있어! 지금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게 틀림없어. 한 번만 싸워 줘요!”

분하다는 듯이 외치는 모습이 정말로 싸워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기세여서, 이데리하는 한숨을 쉬고 나갔다. 쓸데없는 처벌을 가하지 않게 된 것까진 좋았지만, 그 후로 이곳을 놀이터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늘었다.

하기야, 혈기왕성한 나이대의 청년들을 임무 외에는 나가지도 못하게 가둬 두었으니 이런 식으로나마 불만을 푸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이데리하가 나갔는데 나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따라 나갔다.

금발의 청년과 이데리하는 벌써부터 결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정말로 결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한 명뿐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엔지니어들의 눈에 띄는 것은 곤란해.”

나는 싸우고 있는 둘을 내버려 두고, 구석으로 가서 구경 중인 다른 청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가 입대했을 때쯤의 이데리하나 디노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지만, 가슴의 계급장을 보니 아직 훈련생인 모양이었다.

“저도 그렇게 말했어요. 쟤가 안 들어서 그렇지.”

그렇게 말은 하지만, 눈앞의 훈련생은 흥미로워하는 눈으로 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도 대련하는 동안 은근슬쩍 엉덩이를 두들겨 주면 정신 차릴 걸요.”

그저 자신이 친구가 엉덩이를 맞는 것을 구경하고 싶을 뿐인 듯한 청년을 보며, 나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며칠 전, 이곳에 왔던 그 훈련생을 부추긴 게 너인가?”

“아뇨, 쟤요. 요전에 우리 13기 훈련생들이 백업 부대로 임무에 참가하면서 콜벳을 타고 가다가 황야 한가운데에 전에는 없었던 건물이 난데없이 서있는 걸 봤다고 말했는데, 아이자크가 그딴 일이 있겠냐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쟤가 넌 임무 참가 경험도 없는 애송이라 모르는 거라고 쓸데없는 말을 해가지고선.”

“…건물?”

훈련생의 말에 심상치 않은 부분을 느끼고 그에 대해 캐물었다.

바깥의 사람도 아니고 연대 내의 사람에게 정보를 얻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이것은 기회였다.

황야에 나타났다는 정체불명의 건물에 대해 듣는 사이, 금발의 훈련생은 이데리하에 의해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있었다. 나와 대화하던 훈련생은 그 모습을 보고 숨이 넘어가라 웃었다.

“너 돌아가서 말린 다음 옷 갈아입고 바로 자면 되겠다. 샤워 다 했네!”

“장난해? 이거 저기 수로에 흐르던 물이라고! …너도 해!”

“…할 거야?”

“아뇨, 전 쟤 같은 싸움 바보가 아니라서. 저흰 이만 가볼게요!”

그리고는 시설 안쪽 방향으로 내빼 버리자, 나머지 하나도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혼자 남아있기는 역시 좀 그랬는지 따라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따라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향해 감기 조심… 해라. 하고 말하는 이데리하에게 다가간 나는 조금 심각해진 채로 그에게 말했다.

“…다시 나가야겠어. 최대한, 빨리.”

 

그 후로 며칠이 지나지 않아 훈련생의 말을 따라 도착한 장소에는 거대한 건축물이 우뚝 서 있었다,

들었던 묘사대로, 그 외형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황제의 묘.

내가 처음으로 눈을 떴던 그 장소가, 외형만큼은 기억 그대로 위치만 달라진 채 내 눈앞에 있었다.

마치 나를 부르는 것처럼.

“…….”

그러나, 그렇다면 갈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황제도, 엔지니어들이 남긴 장기말도 아닌 나를 부르는, 사라진 땅과 함께 사라졌어야 할 건물.

나는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건물의 안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곳과는 많이 달랐지만, 모르는 장소는 아니었다.

넓은 공간 안에 거울이 붙어 있어, 밖으로 나갈 때마다 제복 대신 입는 사복 차림의 내 모습이 보였다.

거울 속의 나는 아직 늙지 않은 청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나는 내 것이 아닌 향수를 따라 ‘그’들이 쓰던 방으로 향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체스판이 놓인 테이블이 있었다.

모든 것이 기억 속 그대로여서, 마치 금방이라도 ‘그녀’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13세의 아름다운 소녀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내가 당신을 여기로 불렀어. 다시 만나서 기뻐.”

입체 영상의 소녀는 변하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있잖아, 하던 게임을 마저 하자.”

그녀는 체스판을 가리키지 않았다.

“…너에게는, 그 일들이 모두 게임이었나?”

동료를 해쳐야만 했던 그 상황들도? 그러나 입체영상의 소녀는 나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지금, 정말로 입체영상인가?

“당신도 보았겠지, 이 불완전해져버린 세계를.”

“나는 네 말 같은 것은 믿지 않아.”

“하지만 이건 사실이야. 부서진 이 세계를 온전하게 만들고 더 이상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당신이 움직여야만 해.”

소녀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다른 말은 몰라도 이 말만큼은 진실임을 깨닫고 말았다.

나를 위해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실이라는 것이 나에게 이전과 같은 분노를 일으켰다.

“당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은 모두 이 세계와 함께 죽게 될 거야. 어때, 게임을 하겠어?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는 거야.”

“…….”

“걱정 마, 체스판까지의 안내는 내가 해줄게. 나는, ‘그녀’는, 길을 연결하는 힘을 손에 넣었거든. 걱정 마, 이번엔 거기까지 가는 길만큼은 그냥 열어줄 수 있어.”

소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 같았다.

“네 말을 따르기 전에, 하나만 알려줬으면 해. 어째서 나인 거지?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이 세계가 당신의 세계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나도 ‘그’가 아닌 당신에게 접촉해 제안할 수밖에 없는 거지.”

“나는 ‘마르세우스’를 찾아 이 세계에 개입한 것이 아니야. 바로 당신을 찾아 온 거야, ‘막시무스’.”

“그럼 자, 가자. 이 지상 세계의 수호자로서, 새로운 전장으로.”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 손을 잡기 직전, 나는 그녀에게 경고하듯 속삭였다.

“지금은 네 마음대로 하게 두겠다. 하지만 모든 별을 제자리로 돌려놓았을 때, 너의 진의를 파헤쳐 주겠어.”

나의 그 목소리, 그것이 이 공간에서의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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